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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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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352 0 2020-01-16 15:4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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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신규식 출생

 

신규식은 1879년 1월 13일 충북 문의군에서 중추원 의관을 역임한 신용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채호, 신백우와 함께 '산동삼재'라고 불렸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지방 진위대와 연락해 거사를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여 음독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가족들에 의해 목숨을 구하긴 했지만 오른쪽 눈의 신경이 마비되었다.

이후 학회를 조직해 공업계 잡지도 발간하였다. 또한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등 애국계몽단체에도 참가하였고, 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또 다시 음독자살을 시도했으나 나철에 의해 목숨을 구했다.

나라를 빼앗기자 신규식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손문이 이끄는 동맹회에 가입하여 중국의 신해혁명에 공헌하였다.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T.W.)이 14개조의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만주와 각지의 독립운동가와 연락하여 길림에서 독립선언을 하게 하였다. 이어 독립의군부 조직의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지식인 청년그룹으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다.

3·1운동 이후 정부수립운동이 일어나 3월에 해삼위()의 대한국민회의, 4월에 서울의 한성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상해에서도 4월 제헌의정원회의()에서 정부가 수립되고 10개조의 헌장이 채택되었으나 신병으로 참석하지 못해 각료 선출에는 빠졌다.

그 뒤 제1회 의정원회의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7월의 제2회 회의에서는 부의장과 아울러 의원직도 사퇴하였다.

9월에 3개 정부를 통합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11월에 법무총장에 취임하였다. 이듬 해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국무총리대리를 겸임했고, 1921년에는 외무총장도 겸하였다.

이 해 10월 임시정부에서는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그를 특사로 하여 부사 박찬익(), 수행원 민필호() 등을 광둥()의 중화민국정부에 파견하였다. 중화민국정부의 북벌서사식()에 참여하고, 11월 대총통 손문을 만나 국서를 전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그 뒤 신병으로 사표를 제출했으나 처리되지 않았다.

1922년 임시정부의 내분이 표면화되어 이승만에 대한 대통령불신임안이 그의 불참 속에서 통과되었다. 병상에서 25일간 절식을 하다가 독립을 기원하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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