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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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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569 0 2020-01-16 17: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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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운요호 사건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이룬 일본은 대륙침략을 위한 첫 단계로 정한론을 내세우며, 한반도를 침략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정부에서는 점진적 정한론과 금진적 정한론으로 나뉘어져 조선 정벌은 보류하고, 호전적인 무사계급의 불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1874년 5월 대만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정부에서도 쇄국양이정책을 고수하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1873년 12월부터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는 등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조선정부의 정치적 변화는 조선을 정벌하려던 일본 입장에서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부산 왜관(倭館)주재관 오쿠(奧義制)는 즉각 본국 정부에 대원군 실각으로 일본의 대한교섭이 유리해졌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에 일본정부는 조선 정정(政情)을 탐지하기 위해 모리야마(森山茂)를 급히 부산에 파견하였다.
모리야마는 “일본의 대만정벌소식을 듣고 조선은 어찌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다소의 위력을 보임이 좋겠다.”라고 본국 정부에 대한(對韓) 강경 방침을 건의하였다. 조선 정부는 부산훈도(釜山訓導) 현석운(玄昔運)에게 모리야마를 만나 일단 한일국교재개교섭에 합의를 보도록 하였다.
한일 간의 수교교섭의 기초를 마련한 모리야마는 1875년 2월 이사관으로 부산에 재차 부임, 현석운과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한일 간 서계(書契)의 형식, 연회시의 복장 등 여러 문제로 의견이 충돌하여, 교섭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일본 외무성 데라시마(寺島宗則)는 ‘연안측량을 빙자, 군함을 조선근해에 출동, 위혁(威嚇 : 협박)함이 국면타개의 최선책’이라는 모리야마의 대한강경책을 받아들여, 마침내 해군성과 협의, 군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은 5월초 운요호·제이정묘호(第二丁卯號) 등 군함 2척을 부산에 파견하면서, ‘조선국 해로를 연구하기 위한 회항(回航)’이라는 구실로 군함 출동을 단행하였다.
5월 25일 부산에 입항한 운요호는 연안을 종횡무진 탐측하면서 무력적 포함시위를 단행하였다. 심지어 이노우에 함장은 6월 14일 조선 측의 항의를 무시하고, 현석운 등 조선관리를 운요호에 승선시키고 일본군함 2척의 합동발포연습을 관람하게 함으로써, 일본의 대한 포함외교정책을 강행할 것임을 과시하였다. 운요호는 동해안으로 북상하며 무력적 시위를 벌였고, 1875년 9월 20일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에 정박하였다.
수십 명의 일본 해병이 강화도 초지진으로 침입하자, 조선수비병은 정당방위로 침입해오는 일본 보트에 포격을 가했다. 그러자 일본 함대는 초지진에 맹렬한 보복포격을 가했고, 영종도에 상륙한 일본군과 조선수비병 사이의 격전이 벌어졌다. 결국 조선수비병은 패배하고 말았고, 일본군은 무기를 약탈하고, 살육·방화·약탈을 자행한뒤 철수하였다.
운요호 사건은 제국적의적 영토팽창주의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일본의 한반도 침략전쟁의 발단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또한 미국·프랑스 등의 구미열강들이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실패했었지만,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1876년 2월 26일 한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을 체결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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