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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593 0 2020-01-16 17:04:19본문
[1920년] 유관순 순국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서거하자 이화학당의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2월 28일에는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이화학당 학생인 신특실, 노예달 등은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3·1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고등과 1학년인 유관순은 서명학·김복순·김희자·국현숙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여 소복을 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대한문 앞에서 망곡을 한 뒤,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합류하였다.
3월 5일, 학생 연합 시위에 참여한 유관순은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만세운동을 준비하여 1919년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하였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들이 심한 고문을 당했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의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었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1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1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