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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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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658 0 2020-01-16 17: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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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안창호 출생

 

호는 도산(島山)이며, 평안남도 강서에서 안흥국(安興國)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후, 국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상경하여 구세학당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기독교인이 되었고, 서구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1897년에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1898년 만민공동회 개최, 1899년 강서군 동진면 화암리에서 강서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점진학교를 설립하였다.

1900년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한국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대한인공립협회를 설립하였다. 여기에서 야학을 개설하여 회원들을 교육시키고 교포들의 생활향상과 의식계몽에 힘썼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구국운동을 위해 국내로 귀국하였고, 1907년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평양에서 대성학교 설립, 평양과 대구에 출판기관인 태극서관 건립, 평양에 도자기 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 육성에도 노력하였다. 그러나 1909년 10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3개월간 일제에 의해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조직하였고, 1913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흥사단을 창설하여 본국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아 독립운동방략 작성, 연통제 수립, 각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상해 소집 등을 실행하였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취임한 지 2년째인 1921년에 임시정부 내각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다 실패하여 사임했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하였다.

1924년에는 북중국 만주방면을 시찰, 여행하며 이상촌() 후보지를 탐사하고 난징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1924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와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하였으며, 1926년 중국에 돌아와서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하여 이상촌사업을 추진하였다.

1927년 길림에서 군사행동단체의 통일과 대독립당()의 결성을 토의하던 중 동지 200여 명과 함께 중국경찰에 감금되었다가 중국 내 사회여론이 비등하게 되어 20일만에 석방되었다.

1928년 상해에서 이동녕·이시영·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대공주의()를 제창하였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으로 만주에서의 이상촌 계획을 단념하고 난징에서 토지를 매입하였다.

1932년 일본의 중국본토침략정책에 대응하여 독립운동근거지 건설계획을 재검토하던 중, 같은 해 4월 윤봉길()의 상해 훙커우공원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송환되었다.

4년의 실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2년 6개월만에 가출옥하여 지방순회 후 평안남도대보산()송태산장()에서 은거하였다.

1937년 6월 동우회사건()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수감중, 같은 해 12월에 병으로 보석되어 이듬해 3월 경성대학부속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중장을 받았다. 죽은 뒤 망우리에 안장하였다가 1973년 11월 미국에 있던 부인 이혜련()의 유해와 함께 도산공원()으로 이장, 안장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5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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