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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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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463 0 2020-01-16 17: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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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신채호 출생

 

단재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에서 태어났다.

18세 때에 전 학부대신이었던 신기선의 사저에 드나들며 장서를 섭렵했고,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름 높은 유학자인 성균관 교수 이남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독립협회운동에도 참여했다. 22세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 강사로 신규식 등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에도 학원을 설립하는 등 신교육운동을 전개하며 성균관 박사가 되기도 했으나, 관직에 뜻을 버리고 '황성신문'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며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에는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 양기탁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초빙되어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며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관계사 사론을 써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이후 1910년 망명할 때까지 많은 논설과, 역사관계 논문과 시론 등을 연재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역술서인 '이태리건국삼걸전', '을지문덕전' 을 발행했고, '독사신론'은 후에 내용의 일부가 수정되어 '국사사론'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단군, 부여, 고구려 중심의 주체적인 민족주의사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여러 글들을 통해 그의 영웅사관도 보여주고 있다.

28세에는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했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기도 하였다.

1919년 4우러 상해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임시정부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에 맞서 '신대한'을 창간하고 주필이 되어 적극적인 독립노선을 주창하였다. 특히 이승만, 정한경 등의 위임통치청원은 이후에도 계쏙해서 신채호 등에 의해 반민족적 행위로 규탄받았다.

1923년 조선혁명선언으로 불리는 의열단 선언을 집필, 발표하였고 이 선언에서 그는 폭력에 의한 민중 직접 혁명을 주장하였다. 이 선언은 일제의 침략과 압제를 경험하면서 성장한 민중세력을 일제의 이족통치()로부터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약탈적·불평등적인 제국주의 체제를 타파하는 주인공으로 부각시켰다는 의미에서 그의 민족주의 이념의 폭과 질의 강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계속해서 직접적인 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에 나섰던 신채호는, 1928년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으로 이송되었고,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으로 이감되어 복역하던 중 뇌출혈로 순국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3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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