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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신채호 옥사
단재 신채호 선생이 1936년 2월 21일 뤼순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충청남도 대덕 출생으로, 18세 때 전 학부대신 신기선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그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했고, 1901년 향리 부근의 문동학원 강사로 신규식 등과 계몽운동 및 신교육운동을 전개했다.
1905년 황성신문의 기자·논설위원으로 활동했으나 황성신문이 무기정간되자 이듬해 양기탁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됐다. 한편 양기탁· 이동녕· 안창호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에 참여했고 논설을 통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을 거쳐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광복회를 조직,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1919년 베이징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 단장이 되었고, 같은 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의원이 됐다. 1928년 무정부주의 활동과 관련, 체포되어 1930년 다롄 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서 복역중 병사했다.
출처 : 조선닷컴 오늘의 역사(http://db.chosun.com/history/list.jsp?hm=0221&cm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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