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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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ㆍ1운동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ㆍ1운동은 우리나라 근대 민족운동의 분수령이었다. 이전 시기 개화운동과 민중운동 등 방향을 달리했던 세력들이 하나로 뭉쳤으며 이후 모든 운동이 여기에서 갈라져 나갔다. 운동이 소강 상태로 접어드는 4월 하순까지 팔도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는 모두 1,214건, 참가자는 약 110만명에 이르렀다. 시위대 중 7,500여 명이 사망했고 1만6,000명이 다쳤으며 4만7,000명이 검거됐다.

1일 오후 2시에 민족대표 33인은 원래 약속 장소인 파고다공원이 아닌 태화관에 모였다. 파고다공원은 폭동의 우려가 있다며 전날 밤 급히 장소를 바꾼 것이다. 한용운의 인사가 끝난 뒤 민족대표들은 만세삼창을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뒤 곧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기념식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4명을 제외하고 손병희를 포한한 천도교계 16명, 이승훈을 포함한 기독교계 15명, 한용운을 포함한 불교계 2명이 함께했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하고 한용운의 공약 3장은 선언서 끝에 추가됐다. 그리고 파고다공원에 운집한 학생과 시민들은 민족대표들과 별도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가로 행진했다.

이런 전민족적 독립 의지를 바탕으로 4월 10일 중국 상해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입헌공화제를 채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출처 : 조선닷컴 오늘의 역사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list.jsp?hm=0301&cm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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