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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 혁명
1960년 3월 부정선거가 극에 달하자, 4월 전국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여론이 일어났다. 그러던 중 마산의 시민들은 총에 맞아 만신창이가 된 채로 해변가에 버려진 16세 마산상고생 김주열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 소년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마산 경찰에 의하여 체포 당한 학생이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과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시위 도중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시위가 여러 지역에서 발생하자 이승만은 이들을 공산주의에 선동된 폭도로 몰았다. 이승만의 이런 견해에 학생들은 더욱 분노하게 했다. 또한 4월 18일 서울에서 시위하고 있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반공청년당의 폭력배들로부터 습격을 받았다.
이에 분노한 약 3만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4월 19일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경찰은 시위대에 대하여 발포를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부산, 광주, 인천 등의 주요 도시에서도 수천명의 학생들이 가세했다. 정부는 주요 도시에 계엄령을 반포했고, 서울에서만 약 130명이 죽고, 1,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4월 19일 이후 데모는 계속되었고, 학생 뿐 아니라 일반시민들도 가담하였다. 결국 이승만은 반정부 시위에 관하여 더 이상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4월 21일 내각이 전국의 혁명적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5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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