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

본문

[1923년] 관동대지진



1923년 9월 1일 일본의 간토·시즈오카·야마나시 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12만 가구의 집이 무너지고 45만 가구가 불탔으며, 40만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일본의 군부는 대지진으로 인해 나타난 공황상태를 사회주의 운동 탄압의 기회로 삼았다.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인 1923년 9월 1일 오후 경시청은 정부에 출병을 요청함과 동시에 계엄령 선포를 준비하였다. 내무대신 미즈노, 경시총감 아카이케 등은 1일 밤 동경 시내를 일순하였다.

다음날 동경과 가나가와현의 각 경찰서 및 경비대로 하여금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라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하는 한편 각 경찰서에 진상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은 일본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2일 오후 6시 긴급 칙령으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5일에는 계엄사령부에 의해 '조선 문제에 관한 협정'이라는 것이 극비리에 결정되었다.

이와 같은 계엄령 하에 군대·경찰과 각지에 조직된 자경단에 의해 6천여 명의 조선인 및 일본인 사회주의자가 학살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독립신문 특파원 조사에 따르면, 동경에서 752명, 가나가와현에서 1,052명, 사이타마현에서 239명, 지바현에서 293명 등 각지에서 6,661명이 피살된 것으로 되어있다.

특히 자경단들은 죽창·일본도·곤봉 등을 들고 도망치는 한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심지어 경무서내로 도망친 한국인들까지 쫓아 들어와 학살하였는데도 일본 관헌은 이를 방조하였다. 일본 정부에서는 군대·관헌의 학살은 모두 은폐하고, 그 책임을 자경단으로 돌리는 데만 급급하였다. 그 뒤 일부 자경단원은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으나 증거불충반이라는 이유로 모두 석방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477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