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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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청산리 대첩

 

3.1운동 이후 간도지방의 독립군 부대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1919년 8월 조직된 북로군정서는 북만주 일대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사관연성소를 설치해 독립군을 양성했다. 또한 1919년 8월 이후 의병장 출신인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및 국민회군 등이 국경을 넘어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고 철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에 일본군은 홍범도의 독립군을 공격하가다 봉오동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다.

이처럼 활발한 독립군의 활동에 위협을 느낀 일보은 간도지방의 독립군을 소탕하고자 하였다. 일본은 간도지방의 독립군 토벌을 위해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이를 알게 된 독립군 부대에서는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는 주전론과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피전론이 맞섰고, 결국 피전론이 채택되었다. 그런데 이 때 이미 일본군이 부근까지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병력을 급히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김좌진 부대는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며 자제했으나,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0월 21일 비전투원들로 편성된 제1제대와 전투요원으로 편성된 제2제대는 각각 김좌진과 이범석의 지휘 하에 청산리 계곡에서 전투를 준비했다.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청산리 대첩에서 독립군은 26일 새벽까지 10여 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00여 명을 내었다.

청산리 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의 간도 출병 후 그들과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전투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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