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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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늑약 체결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그 해 5월 대한방침, 대한시설강령 등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편성하기 위한 정책을 결정하였다. 그 해 8월 22일에는 제1차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재정, 외교의 실권을 박탈하여 우리의 국정 전반을 장악했다. 그 사이 러일전쟁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국제관계를 주시하며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는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먼저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였고, 8월 12일에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양국으로부터 양해를 받았다. 이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강화조약에서 어떤 방법과 수단으로든 한국정부의 동의만 얻으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다.

고종 위문 특파대사 자격으로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날 고종을 배알하고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오니 대사의 지휘를 따라 조처하소서"라는 내용의 일본왕 친서를 봉정하며 1차 위협을 가했다.

이어 15일에는 고종을 재차 배알하여 한일협약안을 들이밀었는데, 매우 중대한 사안이었기에 조정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혔다. 11월 17일, 일본공사가 한국정부의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에 불러 한일협약의 승인을 꾀하였으나 오후 3시가 되도록 결론을 얻지 못하자, 궁중에 들어가 어전회의를 열게 되었다.

이 날 궁궐 주위와 시내에는 무장한 일본군이 경계를 섰고,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회의에서는 일본의 제안을 거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다시 열린 궁중의 어전회의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일본공사가 이토를 불러왔다.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이토는 다시 회의를 열고,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조약체결에 관한 찬부를 물었다.
이 날 회의에 참석한 대신은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이었다.
이 가운데 한규설민영기는 조약체결에 적극 반대하였다. 이하영권중현은 소극적인 반대의견을 내다가 권중현은 나중에 찬의를 표하였다. 다른 대신들은 이토의 강압에 못이겨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 의사를 밝혔다. 격분한 한규설고종에게 달려가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게 하려다 중도에 쓰러졌다.
이날 밤 이토는 조약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가한 뒤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약을 승인받았다.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의 5명이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로서, 이를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한다.

을사늑약으로 인해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하여 외국에 있던 한국외교기관이 전부 폐지되고 영국·미국·청국·독일·벨기에 등의 주한공사들은 공사관에서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듬 해인 1906년 2월에는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조약 체결의 원흉인 이토가 초대통감으로 취임하였다. 통감부는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 면에서까지도 우리 정부에 직접 명령, 집행하게 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늑약 반대투쟁, 자결, 의병활동, 계몽운동 등 많은 항일구국운동이 일어났지만 결국 1910년 우리나라는 일제에 주권을 완전히 박탈당하게 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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