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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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갑신정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임오군란 이후 주둔한 청군을 몰아내고 나라의 완전 독립을 이루기 위해 먼저 정권을 장악하고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1883년부터 신식 군대를 양성하는 등 무장 정변을 모색하며 준비를 진행해 나갔다.

1884년 봄부터 청과 프랑스 사이에 안남문제를 둘러싸고 전쟁의 조짐이 짙어지자 청은 서울에 주둔시켰던 3,000명의 청군 중 1,500명을 안남전선으로 이동시켰고, 서울에는 1,500명의 청군만이 남게 되었다. 그 후 발발한 청불전쟁이 청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김옥균 등 개화당은 정변을 일으킬 시기가 왔다고 판단하고, 1884년 9월 정변을 단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개화당이 독자적으로 정변을 준비하고 있던 당시, 본국에 갔던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1884년 10월 30일 서울로 돌아와 개화당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바꾸어 적극적인 호의를 보이며 접근해 왔다.

이에 개화당은 부족한 무력을 보충하고 청군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측의 호의에 응하였다. 그래서 일본측으로부터 공사관 병력 150명과 일화 3백만 엔을 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개화당은 일본군이 왕궁 호위와 청군에 대한 방비만을 분담하고, 국내 수구파 제거와 내정 개혁에는 관여하지 않으며, 이것은 오직 개화당이 맡을 것을 요구하여 일본측의 동의를 얻었다.

개화당은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다. 개화당은 우선 국왕과 왕후를 창덕궁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경우궁으로 옮기고 군사 지휘권을 가진 수구파 인사들과 민씨 수구파 인사들을 국왕의 이름으로 불러들여 처단하였다. 그 후 곧 신 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 개화당 대표에 홍영식이 추대되고, 재정은 김옥균, 군사는 박영효와 서재필, 외교는 서광범, 국왕의 비서실장 책임은 박영교가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2월 5일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공표하고, 국왕의 이름으로 미국, 영국, 독일 등 각국의 외교관들을 불러들여 신 정부의 수립과 개혁정치의 실시를 알렸다.

개화당이 정변을 일으키자 청에서는 왕후와 연락을 취하여 경우궁에서 창덕궁으로의 환궁을 주장하도록 하였고, 국왕도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김옥균은 창덕궁은 너무 넓어 개화당의 소수 병력으로 방어하기 어렵기 때문에 환궁에 반대했지만 왕후의 지속적인 환궁 요구로 인해, 결국 12월 5일 국왕과 왕후의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다.

개화당은 신 정부를 수립한 이후 새로운 개혁 정치의 지침인 혁신 정강을 제정, 공포하였다. 혁신 정강은 12월 5일 저녁부터 12월 6일 새벽까지 밤을 새워 협의되어, 6일 오전 9시경에 국왕의 전교 형식으로 공포되고 서울 시내의 요소에 게시되었다. 또한, 이날 오후 3시 고종이 개혁 정치를 천명하는 조서를 내려 공포한 정강의 실시를 선언하였다. 혁신 정강의 조항은 일본인의 기록에 따르면 80여 개 조항이었다고 하지만, 현재 정확히 전해지고 있는 것은 김옥균의 <갑신일록>에 수록되어 있는 14개 조항이다.

 

①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내에 돌려보낼 것, 조공하는 허례를 폐지할 것

②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을 제정하고, 사람의 능력으로써 관직을 택하게 하지 관직으로써 사람을 택하지 않을 것.

③ 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여 간사한 관리들을 근절하고 백성의 곤란을 구하며 겸하여 국가 재정을 유족하게 할 것

④ 내시부()를 폐지하고 그 중에서 재능 있는 자가 있으면 등용할 것

⑤ 그 동안 국가에 해독을 끼친 탐관오리 중에서 심한 자는 처벌할 것.

⑥ 각 도의 환상제도()는 영구히 폐지할 것

⑦ 규장각을 폐지할 것

⑧ 순사제도()를 시급히 실시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⑨ 혜상공국()을 폐지할 것

⑩ 그 동안 유배, 금고()된 사람들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할 것

⑪ 4영()을 합하여 1영을 만들고,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시급히 설치할 것.

⑫ 모든 국가 재정은 호조()로 하여금 관할하게 하며 그 밖의 일체의 재무 관청은 폐지할 것

⑬ 대신과 참찬은 합문() 안의 의정소()에서 매일 회의를 하여 정사를 결정한 뒤에 왕에게 품한 다음 정령()을 공포하여 정사를 집행할 것

⑭ 정부는 육조 외에 무릇 불필요한 관청에 속하는 것은 모두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토의하여 처리하게 할 것

 

이렇게 개혁 정치 실시 조서를 내린 12월 6일 오후 3시 청군은 1,500명의 병력으로 창덕궁을 공격했다. 조선군은 이를 막으려 했지만 패배했고, 도움을 주기로 했던 일본군은 미리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고, 전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철수하였다.

결국 갑신정변은 청군의 공격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개화당의 집권은 '3일 천하'로 끝나게 되었다. 개화당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홍영식, 박영교와 사관생도 7명은 고종을 호위하여 청군에 넘겨준 후 피살되었다. 그 뒤 국내에 남은 개화당들은 민씨 세력에 의해 색출되어 수십명이 피살되고 개화당은 몰락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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