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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이재명 의거
미국에 머물던 이재명은 제1·2차 한일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1907년 10월 귀국하였다. 그리고 1909년 1월 전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과 함께 평양을 순행한 다는 소식을 듣고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자 동지들과 함께 평양역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창호의 만류로 거사를 치르지 못하고 연해주에 머물던 중,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이후 친일매국노를 처단해야겠다고 다짐하여 이완용·이용구·송병준을 각각 이재명·김정익·이동수가 맡아 처단하기로 계획했다.
1909년 12월 22일 서울 종현천주교회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이완용 등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군밤장수로 변장한 뒤 교회당 문밖에서 대기하던 이재명은,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려는 이완용을 칼로 찔러 쓰러뜨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었다. 결국 1910년 9월 30일 오전 11시 사형이 집행되어 세상을 떴다.
체포된 후 재판 과정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을 내보이지 않고, 당당하게 임했다. 사형이 선고되어 형이 확정되었을 때에도, “왜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있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며 재판장을 꾸짖기도 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5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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