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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541 0 2020-01-16 16:49:11본문
[1944년] 여운형 피살
1944년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비밀독립운동 조직을 만들어 해방에 대비했던 여운형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새로운 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하지만 해방 직후 극심한 좌우대립의 와중에서 여운형과 같은 중도파 세력들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다. 그는 1946년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돌아간 후 김규식(金奎植)과 더불어 좌우합작운동을 벌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좌우합작운동 실패 후 잠시 정계를 떠났던 여운형은 1947년 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정계에 복귀하여 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2차 미소공동위원회 역시 난항을 거듭하였고, 이 와중에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달리는 차 안으로 난입한 한지근에 의해 총격을 받고 암살당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5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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